[EHD 시즌 3]: "불의 전도!"
#6 불의 혀들이 각 사람 위에 내리다 (행 2:1-12)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지금 "불의 전도"라는 주제를 따라, 복음을 말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왜 우리의 입술이 복음 앞에서 더듬거리고 있는지를 함께 묵상해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왜 복음에 서툴까요? 왜 우리의 복음을 전하는 말에는 설득력이 없고, 다른 이들의 마음에 닿지 않을까요?
그 이유는 단순합니다. 복음은 그저 정보를 전달하는 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살아 있는 생명의 언어이고, 부서지고 태워져서 깊어진 삶의 향기에서 우러나오는 숯불 같은 언어입니다. 우리가 아직 그 삶을 충분히 살지 못했고, 깨달음과 기도, 연단과 성화가 부족했기에, 우리의 말은 복음을 닮지 못한 채 허공을 맴도는 것입니다.
그러나 희망은 있습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사건에서 그 해답을 봅니다. 성령이 강림하셨을 때, 그들은 "불의 혀"를 받았습니다. 갈라진 불꽃이 각 사람의 위에 머물렀고, 성령으로 충만해진 자들은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말은 단순한 언어가 아니라, 복음 그 자체였습니다. 설득이 아니라, 성령의 임재로부터 타오른 진리였습니다.
왜 불의 혀였을까요? 왜 하필 혀의 모양이었을까요? 그것은 단지 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이제 말하라!”고 명령하시는 장면이기 때문입니다. 침묵의 시간은 끝났고, 복음을 전할 시간, 진리를 외칠 시간이 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날, 베드로는 설교했고, 삼천 명이 주께 돌아왔습니다. 이것은 단지 사도의 능력이 아니라, 성령의 불을 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복음을 말하게 된다는 증거입니다. 이사야의 입술에 숯불이 닿았을 때 그가 “나를 보내소서!” 외쳤듯, 불의 혀를 받은 자는 더는 침묵할 수 없습니다. 존 파이퍼의 말처럼, ‘성령은 당신을 흥분시키기 위해 임하지 않습니다. 복음을 전하게 하기 위해 임하십니다.’
오늘 날 우리의 교회는 말이 넘쳐납니다. 그런데, 불이 없습니다. 불의 혀가 사라졌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복음은 정보가 아니라 불입니다. 우리의 말에 불이 있어야 사람의 마음이 녹고, 어둠 속에 있던 영혼이 돌아옵니다.
그 불이 어디에 임합니까? 오직, 기도의 자리에만 임합니다. 오늘 본문의 실제 장소가 마가의 다락방이든, 솔로몬의 행각이든 상관없습니다. 중요한 건 ‘그들이 함께 기도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불의 혀가 임했고, 그 순간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교회의 본질은 복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복음을 유창하게 전하는 공동체입니다.
우리가 이 광명에 새 성전을 봉헌한 것은 단지 공간을 옮긴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곳을 진정한 기도의 자리로 세우지 않는다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이곳이 불의 혀가 임하는 자리가 될 수 있도록, 우리는 다시 기도의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기도할 시간입니다. 다시 불을 구할 시간입니다. 중보기도팀을 세우고, 기도함을 설치하고, 교회가 함께 기도하는 다락방이 되도록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다시 불의 혀가 임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우리 모두가 복음을 담대히, 그러나 순결하게 말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성령님, 우리에게 다시 불의 혀를 부어 주옵소서!
아멘.
[EHD 시즌 3]: "불의 전도!"
#6 불의 혀들이 각 사람 위에 내리다 (행 2:1-12)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지금 "불의 전도"라는 주제를 따라, 복음을 말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왜 우리의 입술이 복음 앞에서 더듬거리고 있는지를 함께 묵상해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왜 복음에 서툴까요? 왜 우리의 복음을 전하는 말에는 설득력이 없고, 다른 이들의 마음에 닿지 않을까요?
그 이유는 단순합니다. 복음은 그저 정보를 전달하는 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살아 있는 생명의 언어이고, 부서지고 태워져서 깊어진 삶의 향기에서 우러나오는 숯불 같은 언어입니다. 우리가 아직 그 삶을 충분히 살지 못했고, 깨달음과 기도, 연단과 성화가 부족했기에, 우리의 말은 복음을 닮지 못한 채 허공을 맴도는 것입니다.
그러나 희망은 있습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사건에서 그 해답을 봅니다. 성령이 강림하셨을 때, 그들은 "불의 혀"를 받았습니다. 갈라진 불꽃이 각 사람의 위에 머물렀고, 성령으로 충만해진 자들은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말은 단순한 언어가 아니라, 복음 그 자체였습니다. 설득이 아니라, 성령의 임재로부터 타오른 진리였습니다.
왜 불의 혀였을까요? 왜 하필 혀의 모양이었을까요? 그것은 단지 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이제 말하라!”고 명령하시는 장면이기 때문입니다. 침묵의 시간은 끝났고, 복음을 전할 시간, 진리를 외칠 시간이 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날, 베드로는 설교했고, 삼천 명이 주께 돌아왔습니다. 이것은 단지 사도의 능력이 아니라, 성령의 불을 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복음을 말하게 된다는 증거입니다. 이사야의 입술에 숯불이 닿았을 때 그가 “나를 보내소서!” 외쳤듯, 불의 혀를 받은 자는 더는 침묵할 수 없습니다. 존 파이퍼의 말처럼, ‘성령은 당신을 흥분시키기 위해 임하지 않습니다. 복음을 전하게 하기 위해 임하십니다.’
오늘 날 우리의 교회는 말이 넘쳐납니다. 그런데, 불이 없습니다. 불의 혀가 사라졌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복음은 정보가 아니라 불입니다. 우리의 말에 불이 있어야 사람의 마음이 녹고, 어둠 속에 있던 영혼이 돌아옵니다.
그 불이 어디에 임합니까? 오직, 기도의 자리에만 임합니다. 오늘 본문의 실제 장소가 마가의 다락방이든, 솔로몬의 행각이든 상관없습니다. 중요한 건 ‘그들이 함께 기도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불의 혀가 임했고, 그 순간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교회의 본질은 복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복음을 유창하게 전하는 공동체입니다.
우리가 이 광명에 새 성전을 봉헌한 것은 단지 공간을 옮긴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곳을 진정한 기도의 자리로 세우지 않는다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이곳이 불의 혀가 임하는 자리가 될 수 있도록, 우리는 다시 기도의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기도할 시간입니다. 다시 불을 구할 시간입니다. 중보기도팀을 세우고, 기도함을 설치하고, 교회가 함께 기도하는 다락방이 되도록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다시 불의 혀가 임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우리 모두가 복음을 담대히, 그러나 순결하게 말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성령님, 우리에게 다시 불의 혀를 부어 주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