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oming the Gospel" #21 영광의 복음(6): 환난이 소망(ἐλπίς 엘피스)을 낳기까지 (로마서 5:3–4, 8:12–30)

  바울은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환난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단련된 인격(연단)을 낳고, 단련된 인격은 희망을 낳는다.’(롬 5:3–4) 그러나 모든 고난이 사람을 자동으로 성숙하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고난 때문에 마음이 무너지고 하나님을 원망할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환난의 끝이 소망(ἐλπίς 엘피스)이라고 말하는 것일까요?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먼저 우리가 누구인지를 밝힙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버려진 사람으로 고난을 통과하지 않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가족이며, 그리스도와 함께 누릴 영광이 약속된 사람으로 이 시간을 살아갑니다. 그리고 자녀이면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상속자입니다(롬 8:14–17). 고난에서 영광으로, 죽음에서 부활로 나아가신 그리스도의 이야기가 우리의 이야기가 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가족의 공동 운명이 우리의 삶이라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피조세계 전체는 허무(ματαιότης 마타이오테스)와 썩어짐(φθορά 프토라) 아래 놓여져 있습니다. (롬 8:18–21) 타락 이후 우리의 세계에는 쇠퇴와 질병과 죽음이 있고, 인간의 탐욕과 분노와 폭력이 서로 부딪치며 수많은 상처를 만들어냅니다. ‘하나님께서 피조물을 허무에 굴복시키셨다’는 표현은 자칫 오해를 불어 일으킬 수 있으나, 이는 창세기 3장과 연결하여 읽어야 합니다. 죄가 들어와 이 땅은 저주를 받고 피조세계는 죽음이라는 형벌 속에 놓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타락한 세계를 그의 심판으로 한 번에 다 멸하시거나, 창조 자체를 폐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생명나무 길을 막으심(창3:24)으로 그 망가진 상태가 그대로 영원히 존속되도록 방치해 두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이 피조세계를 잠시 ‘허무에 굴복’하게 하신 일이 ‘소망 가운데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피조세계를 마침내 그 허무와 썩어짐에서 해방하여 새롭게 변화시킬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현재 이 환난 시대의 고통을 단순한 죽음의 신음이 아니라 해산의 진통이라고 표현합니다(롬 8:22). 우리는 세상의 마지막 숨을 듣고 있는 것이 아니라, 새 창조가 태어나기 전의 진통을 지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성령의 첫 열매를 받은 우리도 여전히 탄식하고 있습니다. (8:23). 새생명은 이미 시작되었지만 우리의 몸의 완전한 속량은 아직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첫 열매로 우리 안에 계신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수확이 반드시 완성될 것이라는 보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직 보이지 않는 것을 인내(ὑπομονή 휘포모네)하며 기다립니다(8:25).

  이 긴 인내의 시간에도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우리가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조차 모를 때 성령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며 친히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십니다(롬 8:26–27). 그리고 하나님은 고난과 탄식, 기다림과 연약함까지 우리의 삶에 흩어진 모든 것을 헛되이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모든 일이 서로 협력해서 선을 이룬다”(8:28)는 말씀의 ‘선’은 바로 다음 절에서 밝혀집니다.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시려고…!”(8:29) 하나님은 인내의 시간을 통하여 우리를 ‘단련된 인격(δοκιμή 도키메)’으로 연단하시고, 맏아들이신 그리스도를 닮은 자녀들의 가족을 빚어가십니다. 그리스도를 닮는 크리스토시스(Christosis)는 마침내 하나님의 생명과 영광에 참여하는 θέωσις(테오시스)로 이어집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 연단이 소망을 낳을까요? 고난을 만나기 전 우리의 믿음에는 자신도 모르는 조건이 붙어 있을 수 있습니다. “주님을 믿습니다. 다만 이것만은 잃지 않게 해주십시오.” 그러나 환난은 그 조건들을 흔듭니다. 그때 성령의 도움으로 하나님과 함께 그 시간을 지나고 나면 한 가지가 마음에 남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끝까지 붙들어서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내가 놓아버린 순간에도 하나님께서 내 손을 놓지 않으셨다는 기억입니다.

  터널을 무서워하던 아이가 처음에는 부모의 손을 꼭 붙들고 지나갑니다. 그러나 같은 터널을 여러 번 함께 지나고 나면 어느 순간부터는 터널의 어둠보다 저편의 출구를 찾기 시작합니다. 터널이 짧아진 것도, 어둠이 없어진 것도 아닙니다. 함께 지나온 기억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소망도 그렇습니다. “이번 일은 잘 해결되겠지”라는 막연한 낙관에서, “결과가 무엇이든 그 과정 중에도, 그리고 그 끝에도 아버지가 계실 것을 안다”는 믿음으로 깊어집니다.

  그렇게 한 번, 두 번 삶의 터널을 아버지와 함께 지나온 사람은 마침내 죽음이라는 마지막 터널 앞에서도 소망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죽음을 지나 부활의 빛으로 나오셨고, 지금까지 우리를 놓지 않으신 아버지께서 마지막에도 놓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환난이 소망을 낳기까지,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성령은 우리를 인내하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빚으시며, 마침내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가족으로 완성하실 것입니다. 아멘.